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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끄적대기

[수필] 기억의 목소리: 용사와 악마

by 창창한 포리얌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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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으로 온세상이 시끄럽던 그 해, 우리가족은 서울에 살았다.

마침 우리집은 올림픽공원이 지척에 있는 송파구에 있었다. 동네에는 엇비슷한 높이의 단독주택들이 주뼜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땅거미가 질 무렵의 놀이터에는 더 놀고 싶은 아이들과 집에 들어오라는 엄마들의 실갱이가 시작되곤 했다.

 

아빠는 늘 그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저 멀리서 아빠차가 보이면 난 초록색 번호판부터 먼저 확인했다.

'서울00 가에 1942' 검정색 네모난 차 뒤에는 V6 라는 글자가 위엄있게 새겨져 있었다. 

그랜다이저라는 로보트 만화가 한창 인기있었는데, 마침 아빠차 이름이 로보트와 비슷했고, 그 차는 나에게 그랜다이저 v6가 되었다.

 

그랜다이저 v6에서 피자상자를 들고 걸어오시던 아빠는 나에게 지구를 구해줄 용사보다 위대해 보였다.

주사위가 그려진 상자, 메뉴는 늘 슈퍼슈프림이었다. 옥수수에 치즈와 파인애플의 조합은 예술이었다. 우리 네 식구는 반지하 단칸방에 옹기종기 앉아 호화로운 만찬을 벌였다. 여름에 비가 억수로 내일때에는 다같이 양동이에 물을 퍼내기도 하고, 연탄을 잘 끄지 않고 잠이 들었을 때에는 가스중독이 될 뻔도 했다. 

 

아빠는 늘 집에 오시면 된장찌개를 찾으셨다. 학교를 마치고 집을 찾아가는 길을 어렵지 않았다. 구수한 된장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집 앞에 와 있었다. 가끔 된장찌개가 지겨워질 즈음이면 시래기국이 올라오곤 했는데, 우리집 옆 공터에 자라고 있는 시래기는 엄마가 요리를 하는 날이면 부쩍 그 양이 줄어 있었다. 

 

담 넘어 옆에는 바로 주인집이었다. 으리으리한 2층짜리 주택이었는데, 엄마손 잡고 놀러가는 날이면 주인집 녀석들은 오락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한판만 하고 간다고 나와 형이 때를 쓸때면 엄마는 얼른 집에 가자며 우리 손을 잡아 끌었다.

 

나도 오락기가 갖고 싶었다. 제일 친한 친구인 요한이네 집에도 있었고, 우리보다 더 작은 집에 사는 아이 집에도 있었다. 아빠차는 그랜다이저v6였지만, 나의 오락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요즘애들 오락기 없는집이 없는데 우리도 하나 사주자'고 했고, 엄마는 '돈이 얼만데 그런소리 하노? 이인간이 정신이 있나 없나?'라고 받아쳤다. 나의 용사 아빠는 마왕 엄마에게 말빨로 지고서는 대문을 열고 어디론가 나가시고는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서 돌아오셨다.

 

어느 일요일날, 집 앞 교회 앞에는 서울가00 1942 그랜다이저v6가 서 있었다. 아빠는 창문을 열고는 '손님하고 약속이 있어 현대백화점에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엄마한테는 친구집 간다고 뻥을 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썬그라스를 끼고 한쪽 팔을 운전석에 걸친 아빠는 007 제임스본드였다.

 

아빠가 말한 손님이 게임기 매장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아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아빠 손에는 현대슈퍼컴보이와 게임팩들이 주렁주렁 들려 있었고, 어째 우리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판 싸울 줄 알았던 용사와 마왕은 그날에는 휴전하기로 합의를 한 건지 싸우지 않았다. 안방에서는 밤새도록 불및이 새어나왔고, 감탄사들과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용사와 마왕이 공존하는 세상이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아빠와 엄마는 그 동안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는 진정한 용사들이 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이랄의 용사 '링크'에 빙의되어 가논에게 잡힌 젤다공주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서울00 가 1942 그랜다이저v6는 술에 취한 아빠 대신 이제는 하이랄의 용사 링크를 태우고 집으로 왔다. 그렇게 며칠밤을 하얗게 불태웠을까, 악당 가논을 처치하고 젤다공주를 구한 두 사람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와 형에게 게임기를 하사했다.

 

그렇게 하이랄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우리 집에는 다시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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